계속되는 신여성들의 역사

현재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의 인권신장을 위해, 성 평등을 위해 여러 일들을 하고 있죠. 오늘은 과거 1900년대의 페미니스트, ‘신여성’들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신여성의 등장

‘신여성’은 여성에 대한 사회 정치적, 제도적 불평등에 문제를 제기하고 자유와 해방을 추구한 근대기 새로운 여성상을 의미합니다. 이는 19세기 말, 유럽과 미국에서 시작하여 20세기 초 일본, 조선 등 아시아 국가에서 사용되는 범세계적으로 나타난 현상인데요, 조선의 경우 1890년대부터 사회 영역에 근대 교육을 받고 지식과 교양을 몸에 익힌 새로운 유형의 여성들이 진출하였으며, 1920년대에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새로운 여성 집단이 출현했습니다.

당시 조선사회는 17세기 이후 성리학의 지배 이념이 확고하게 성립된 이후, 철저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가 강요되어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죠. 특히 결혼에 의한 임신, 출산, 양육, 가사노동의 의무는 여성이 사회활동에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여성에 대한 차별적 상황에 저항하고 목소리를 남긴 이들이 나타났고, 그들은 ‘신여성’이라고 칭해지게 됩니다.

신여성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고 볼 수 있어요. 활동하던 시기에 따라, 그들이 가진 직업에 따라, 지향하는 이념에 따라 그들은 다양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여성 자신의 인격과 개성에 대한 존중, 가부장 권력에 대한 도전, 남성과 여성의 평등한 권리와 여성 해방, 자유 연애와 자유 결혼 등을 주장하면서 이들의 움직임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 운동의 역사에 매우 큰 영향을 남겼습니다.


신여성들의 모습

의복에서의 근대화가 진행됨에 따라 서구의 의복 문화가 도입되고, 전통 옷은 서양식으로 조금씩 바뀌게 되었습니다. 특히 옷을 개량함으로써 여성의 사회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는 편안하고 실용적인 의복을 만들고자 하는 의복 개량 운동이 일어났는데요, 이에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들을 중심으로 활동에 지장이 없도록 치마 길이가 짧아지며 주름이 넓게 잡아지게 되었습니다.

저고리 길이가 길고, 통치마에 주름이 넓게 잡혀 있으며, 종아리가 드러나는 짧은 치마의 개량한복을 입거나, 양장에 스카프를 두르고 단발머리에 하이힐을 신은 모습이 당시의 전형적인 신여성의 모습이라고 해요. 이러한 모습은 전통적 유교사회에서의 어머니와 아내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고, 이러한 관점에서 서구식 외양은 관습적인 여성성을 부인하는 것이고, 전통적인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역할을 부인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전통적 유교 문명에서는 언제나 여성들에게 감춤이 요구되었습니다. 여성의 육체미, 성욕 등은 감추어 져야하고, 내면적인 아름다움이 강조되었습니다. 과부에게는 수절이 최고의 미덕으로 강조되었고, 복장은 될 수 있는 대로 여성의 육체 선이 드러나지 않도록, 가슴 아래로 치마를 여러 겹 둘러 입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전통에 반대하여, 근대에서는 감추는 것 대신 드러내는 것을 추구하였는데요, 감추는 것은 억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드러내는 것은 해방된 것이자 자유로운 것으로 강조되어졌습니다.


특히, 여성의 단발은 1920년대에 유행하기 시작하여 1930년대 중 후반까지 오랫동안 지속되었는데요, ‘모단걸(毛斷榤)’이라는 용어가 나타날 정도로, 신여성에게서 나타나는 근대성의 지표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단발을 꼽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모단’으로 지칭되었던 단발은, 단순히 머리털을 자르는 행위 이상으로, 구시대의 의식을 버리고 새로운 문명을 맞이하는, 진보적 상징이자 개혁적인 몸짓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1920년대, 사회주의 노선을 밟아 갔던 몇몇 신여성들은 단발이 대중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중에게 좀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 한동한 고수했던 단발을 버리고 다시 전통적인 머리모양으로 되돌아가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신여성들의 신체는 집안일 밖에 몰랐던 전통적인 규범에 충실한 여성상에서 소비문화의 정착과 확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새로운 여성상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들의 화려한 장신구와 단발, 화장, 그리고 양장은 근대 도시의 소비문화를 선도해갔죠.


여성교육

신여성이 등장할 수 있었던 첫번째 배경은 근대적 여성교육의 확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1886년 최초의 근대적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시작으로 정의여학교, 배화여학교등 많은 여학교들이 설립되었고 1920년대에서는 사회 전반에 걸친 계몽주의적 기운에 의해 교육기회의 확대와 고등교육의 실시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해요. 많은 여성들이 항일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3.1운동은 여성의 사회적 각성의 계기가 되었고, 이로 인해 사회참여와 여성교육의 이념에서 평등을 지향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여성의 교육기회 확대는 야학, 강습회, 교회 활동 등 학교교육 외에 계몽운동, 애국운동 등의 차원에서 여성 교육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수많은 조선여성들이 외국으로 유학을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여성의 근대 교육은 사회적 존재로서 여성의 자각과 인식을 일깨워 주었으며, 신여성의 등장을 가능하게 한 기본적 발판을 마련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근대 여성교육에도 한계가 존재하였는데요, 당시의 여성교육은 여성 개인의 자아 발전을 위해서라기보다 어머니로서의 역할, 가정내의 교육의 근원으로 강조되어졌다고 합니다. 즉 가족 구성원을 보살피고 교육시키는 데 여성의 존재 이유를 두고 여성을 위한 교육 또한 그러한 측면에서 필요함을 강조한 것이죠.


신여성의 세대교체

신여성들의 스팩트럼은 매우 넓었으며, 각자 다른 세대, 이념, 식민주의에 대한 견해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1900년대 제1세대, 1920년대의 제2세대, 1930년대 중반 이후 제3세대 근대 여성으로 나눔으로써 그들에 대해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해요.

1세대 근대 1910년대 말에 등장하여 남성 권리 영역을 그대로 인정한 채 여성의 지위 향상을 촉구했다고 해요. 반면 2세대에서는 여성의 열악한 지위가 남성 지배와 관련이 있다고 보며 가부장 권력에 도전하였습니다. 자유 연애와 여성 해방을 공론화한 나혜석, 윤심덕 등을 대표적으로 볼 수 있죠. 2~3세대 여성들은 이념에 따라 다시 자유주의 계열 여성들과 사회주의계열 여성들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 계열 여성들은 가정일, 육아 등 어머니 세대의 전통을 어느정도 계승했다고 해요. 근대 가부장 질서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화해의 방식을 통해 이들은 남성 중심의 식민지 기성 체제를 떠받치는 주요 기둥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자유주의 여성들과 대척한 사회주의 계열 여성들은 계급이 있는 한, 진정한 의미의 평등이 성립할 수 없다고 보며, 가장 먼저 계급의 타파를 주장했어요. 이 계열의 신여성들은 직접 항일무장 투쟁에 나서는 등 매우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지만, 이념의 문제로 인해 많은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여성잡지, 『신여성』 新女性

1920-30년대에는 수많은 여성잡지들이 창간되고 동시에 폐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20년대 초 이화학당 출신의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어 창간한 『신여자』 또한 선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어려운 출간 조건에 의해 5개월만에 종간되었는데요, 이러한 상황에서의 『신여성』은 천도교의 자금력을 바탕으로 주요멤버들이 헌식적으로 활동했던 ‘개벽사’가 있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출간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신여성』은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발행된 여성잡지로, 『신여성』만 보면 7년 동안 간행되었고, 같은 내용의 개벽사에서 출간한 『부인』과 『별건곤』을 포함하면 약 12년간 이어졌다고 할 수 있어요. 이 잡지는 계몽을 촉구하는 논문, 시, 소설, 수필과 함께 생활기사, 여학생과 모던 걸 관련 유행과 사회적 이슈, 대중문화와 생활 개선에 관한 담론 등 근대 신여성을 둘러싼 사회적 이슈의 집결지라고 볼 수 있다고 해요.

『신여성』에 기고된 당시 신여성들을 둘러싼 많은 이야기들은 마냥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여러 신여성들이 언론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지만, 여전히 잡지에 올라오는 글들은 대부분 남성들에 의해 쓰여진 것이었고, 『신여성』에 올라온 글들 또한 대부분 남성적 시선에 의해 쓰여진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풍경 중에 신여성의 외양은 대중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는데요, 새로운 근대문명의 상징이며 진보적, 개혁적 움직임을 의미하는 신여성들의 외양 변화는 당대 지식인 남성들에 의해 성적 욕망을 일으키는 자극제로 변질되었고, 사치의 대명사로 빈번히 조롱당했다고 합니다. 특히 1920년대 후반~ 1930년대 출간된 『별건곤』 에서는 거리를 지나가는 신여성의 ‘몸’을 보는 남성의 시선, 그리고 허영에 들떠 있는 단발머리의 신여성들에 대해 풍자, 비판하는 글들이 많이 기제되었습니다. 이는 외양의 변화를 통해 전통적 여성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체성을 추구하고자 하던 신여성들의 의도를 완전히 빗겨 나가게 만들어 버린 것이었죠.


1930년대 이후의 신여성

1930년대 후반, 일제의 식민지 수탈이 강화되는 가운데 조선사회에는 닥친 끔찍한 가난은 조선사회에 더 이상 성평등과 여성해방을 말하기 힘든 분위기를 조성하였습니다. 경제, 사회적으로 불안정해진 상황에서 개인을 강조하며 자유주의 사상을 주장하는 신여성들은 점차적으로 배제되어 갔고, 비판과 가십거리의 대상으로 전략하게 되었죠.

동시에 근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확대되어 근대 문화는 소비적, 향락적 모습으로 이미지화 되면서 집중적인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소비적이고 향락적인 근대 문화의 확대에 의해 언론 매체 또한 상업적이고 선정적인 방향으로 향하게 되었고 언론업체에서는 신문이나 잡지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여성의 성과 미를 상품화하여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욕구를 충족시켰습니다. 이렇게 본격화된 자본주의의 움직임은 신여성들을 관음적 시각을 만족시키는 흥미의 대상이나 새로운 상품 소비의 모델로서만 다루어지게 만들어 버린 것이죠.

이렇게 신여성을 상품화시키고, 끊임없이 호기심의 대상으로 만드는 동시에, 남성적 도덕 잣대를 내세워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현모양처, 즉 구여성의 모성과 정조 관념 대한 예찬이 시작되었고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의 변화와 사회적 주류를 차지했던 남성들의 태도변화에 따라 여성의 권리를 주장했던 신여성들은 빠르게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여성의 출현은 모성과 가족 등에 대한 관심에서 여성 자체로 옮기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누군가의 아내, 어머니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했지만,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싸우면서도 자식과 남편을 돌보고 보살피는 역할이 강요 받는 삶을 살아갔죠.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우리는 과거보다 더 진보된 사회에서 살고 있을까요? 100여년 전 신여성들이 원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걸까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어떠한 방향으로 신여성들의 역사를 계속해서 이어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반성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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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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