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안경은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여러분들 모두 안녕하세요! 저는 코스토리 새 애디터 ‘파랑’입니다. 이번 글을 통해 여러분들과 처음으로 만나게 되어서 기쁘고 기대됩니다.

여러분들은 안경을 쓰시나요? 통계청에 따르면 2013년 기준 우리나라 전제 29.9%가 안경을 쓴다고 합니다. 저도 어릴 때부터 안경을 써와서 안경이 주는 편리함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편리한 안경은 언제 처음 만들어지고 또 우리나라에는 언제부터 안경이 사용되었을까요??


1. 안경의 기원

최초의 안경은 13세기 말 이탈리아 베니스 유리공들에 의해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이전에도 눈 보호를 목적으로 한 안경들이 사용되었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력을 교정하기 위한 안경은 13세기에 되어서야 발명되었습니다. 당시 안경은 눈이 노화되어 책을 읽기 힘든 성직자들이 사용하였고 대중적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1450년 구텐베르크에 의해 인쇄혁명이 일어나면서 책이 대중들에게 확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성직자들이 아닌 일반 대중들도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고 이들의 안경에 대한 수요도 급증하여 본격적으로 안경이 대중들의 품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즉,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 이전의 안경은 일부 사회지도층의 사치품이며 호사품이었지만,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 이후 안경은 생활의 필수품이 되어 대중 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2. 우리나라에서 안경

그러면 우리나라에서는 안경이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요? 남아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안경에 대한 기록은 1606년 이호민(1553~1634)이 쓴 <안경명 眼鏡銘>입니다.

이글에서 이호민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화인(중국인)이 밝고 깨끗한 양의 뿔을 사용해 두 눈 모양으로 만드는데, 눈이 어두운 사람이 눈에 쓰고 글을 보면 잔글씨가 크게 보이고, 흐릿한 것이 밝게 보인다. 이것을 안경이라 부른다.” 이호민, 안경명(眼鏡銘)에서

비슷한 시기에 이수광은 1614년에 간행된 ≪지봉유설 芝峯類說≫에서
“ 소설에 ‘안경: 노년에 책을 보면 작을 글자가 크게 보인다.’하였다. 듣자니 예전에 중국장수 심유경 과 왜국의 스님 겐소는 모두 노인이었지만 안경을 써서 잔글씨를 읽을 수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에서는 일찍이 본적이 없는 것이었다. 안경은 대개 해방海蛖(바다조개)종류인데 그 껍데기로 만 든다고 한다.” 라고 쓰고 있습니다.

위 책들에서 이호민은 안경을 양의 뿔을 이용해 만든다고 하고, 이수광은 바다조개로 만든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유리로 만든 안경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이호민과 이수광이 직접 안경을 보지 못하고 전해들은 것만으로 책을 썻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헌자료는 아니지만 이호민과 이수광의 자료보다 연대가 올라가는 자료도 있습니다. 위에 보이는 안경이 그것입니다. 이는 김성일(1538~1593)이 썼던 것으로 알려진 안경입니다. 김성일은 1577년에 북경에 사절로 파면된 적이 있었고, 1590년 통신사의 부사로 일본에 다녀간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안경은 북경이나 일본에서 구입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를 토대로 보면, 안경은 임진왜란 전후로 조선에 알려졌고, 이내 중국에서 수입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3. 안경의 이용

17세기에 조선에 수입된 안경은 조선의 양반들 사이에서 빠르게 인기를 얻었습니다. 스스로를 독서인으로 여겼던 당시의 양반들에게 안경은 그야말로 축복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나이가 들면서 사라져가는 젊은 시절의 시력을 되찾아준 안경에 환호했습니다.

양반들에게 인기를 얻은 안경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서민들 사이에서도 널리 성행하였습니다. 시전상인, 바느질하는 부녀자, 정밀한 작업을 해야 하는 공장, 금과 은을 세공하는 장인들, 침을 놓는 의원들 등 많은 사람들이 안경을 착용했습니다. 진경산수로 유명한 정선은 여든이 넘어서까지 작품 활동을 했는데 안경이 없었다면 그림을 그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19세기가 되면서 시골 사람들까지도 모두 안경을 착용할 정도로 안경은 이미 서민들 사이에 흔한 물건이 되었습니다.



4. 안경관리법과 풍습

조선시대에 안경은 오늘날처럼 항상 착용하는 것이 아니라 안경을 안경집에 넣고 허리에 차고 다니다가 필요할 때만 꺼내어 썻습니다. 안경집은 남에게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 재질로 아름답게 만었습니다.


또 안경에 관한 예절도 있었다. 사람이 모인 곳이나 지위나 연령이 높은 사람 앞에서는 안경을 착용할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조선 말 일본대사 오이시가 안경을 쓴 채로 고종을 대하자 고종은 “이 자가 조선을 얕보는 구나”라며 크게 화를 내었습니다. 이어 조선의 대신들은 일본에 공식적으로 항의 했고, 오이시의 통역을 맡았던 통역관은 유배를 가기도 했습니다.
또 이조판서를 지낸 조병구는 자신의 여동생인 신정왕후 앞에서 안경을 쓰고 있다가 헌종의 눈에 띄어 크게 미움을 삽니다. 헌종은 그를 보고 ‘아무리 외척의 목이라고 해서 칼날이 들지 않을까’라고 책망하였고 이에 죄책감과 두려움에 시달리던 조병구는 집에 돌아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5. 조선에서 만든 안경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안경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언제일까요? 조선에서도 안경이 수입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안경을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에서는 수정으로 안경을 만들었습니다. 수정으로 만든 안경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경주 ‘옥돌안경’, 혹은 경주 ‘남석안경’으로 불리는 안경입니다. ‘남석’은 수정이 경주 남산에서 채굴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17세기 전반부터 시작된 경주 남석 안경의 제작은 일제강점기까지도 이어졌습니다. 경주 남석을 채취하여 안경을 만드는 공방이 경주에 여럿 존재했습니다. 20세기 후반까지도 남석 안경을 만드는 전문가와 그의 공방이 경주에 있었을 정도로, 남석 안경의 제작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39년 경주 남산의 채취가 금지됨에 따라 남석안경을 제작하는데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그 이후 1968년, 남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됨에 따라 남석안경을 제작하는 일은 불가능해졌고 더 이상 남석안경이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안경의 기원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이 글을 쓰기 전만 해도 안경이 이렇게 오래된 물건인 줄 몰랐습니다. 또 조선시대에 몇몇 지식인들만이 사용하는 물건이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18세기에 들어서 안경은 지식인들 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 모두 사용할 정도로 상용화되었다는 것에 놀라웠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셨나요?

이상 애디터‘파랑’의 첫 글이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다음에는 더 재미있는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기대해 주세요!!

About the Author

minimonia

한마디는 글쓴이에게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