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꽃놀이, 어디까지 알고있니?

안녕하세요~ 벌써 날씨도 꽤 따뜻해지고 주변에 꽃 핀 걸 보면서 새삼 봄이 왔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인터넷에서도 벚꽃축제 명소나 축제 일정을 소개하는 글들도 보이고요. 그러다 저는 문득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꽃놀이가 있었고 어떤 꽃놀이가 있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의 주제는 우리나라의 꽃놀이입니다!



1. 우리의 전통적 꽃놀이는 언제부터?

위의 그림을 보듯이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꽃놀이를 즐겨왔습니다. 우리 선조가 전통적으로 즐기던 꽃놀이는 화전(花煎)놀이는 화류(花柳)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역사 또한 매우 깁니다.

이런 꽃놀이의 시작은 무려 삼국시대까지 올라갑니다. 조선시대에 쓰여진 경상도에 관한 지리지인 『교남지』를 보면 경주의 화절현(花折峴)이라는 지명은 신라의 궁인들이 봄놀이를 하며 그곳에서 꽃을 꺾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소개하고 있고, 또 같은 책에서 재매곡(財買谷)을 소개하면서 “김유신의 맏딸 재매 부인을 청연의 위에 있는 골짜기에 묻었으므로 이 이름을 붙였는데 해마다 봄에 같은 집안의 부녀자들이 그 골짜기의 남쪽 물가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이 시기에는 수많은 꽃이 만발하고 송화가 골짜기에 가득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2.사계절 풍류와 함께 즐겼던 꽃놀이

이렇게 오랫동안 이어온 꽃놀이의 형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교남지』에 써있듯 봄에는 남녀노소가 무리 지어 화창한 날에 경치 좋은 산이나 냇가에 나가 놀이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꼭 봄이 아니더라도 꽃놀이를 즐겼습니다. 이에 대한 기록은 고려 시대 문신 이승휴가 참석한 잔치인 장미연(薔薇宴)에서 지은 시의 서문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요.


이를 보면 고려시대 여름철 장미가 만개할 때, 장미연이라는 잔치와 시회를 개최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계절별로 즐기는 꽃놀이에 따라 이름도 달랐습니다.

봄에는 상화회(賞花會)라하여 주로 진달래와 살구꽃을 보며 꽃놀이를 즐겼습니다. 이때 어떻게 놀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권상신의 『남고춘약』을 보면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운치 있는 꽃놀이를 위한 규약을 정해두었습니다. 꽃놀이를 나갈 때 날씨를 개의치 않기로 하고, 옷과 신발을 아까워해 가지 않으려는 사람, 이동할 때 보조를 맞추지 않는 사람, 꽃구경할 때 꽃을 꺾는 사람에게 벌칙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때 규칙에 따른 벌칙은 각각 달랐지만 가장 심한 것이 술 5잔을 받는 것이라고합니다. 그리고 술을 마실 때의 규약도 정해져 있었습니다. 작은잔을 나이순으로 돌리며 술을 마셨으며 술잔에 술이 남았으면 사양하지 않는게 예법이었습니다. 이때 전원이 술을 마시되 술을 마실 수 없는 사람은 꽃 아래에 술을 붓고 “삼가 꽃의 신이시여 주량을 살피소서. 주량이 정말 적으니, 이 때문에 술을 땅에 붓습니다”라고 사죄해야 했다고 합니다. 이래도 술을 남겨둔 채 마시지 않는 사람은 벌칙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름에는 피서음(避暑飮)이라는 이름으로 주로 연꽃을 감상하며 즐기던 것이 보통입니다. 이 피서음은 당나라와 원나라때 유행한 문화로 고려 말 문인들 사이에는 이미 이런 풍속이 들어와있었습니다. 이 피서음에서 특이한 것은 술잔을 연잎으로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만든 술잔을 벽송배(碧松杯), 이렇게 마시는 술을 벽통주(碧筒酒), 이런 풍류를 벽통음(碧筒飮)이라 하였습니다.

국화가 피는 가을에는 황국음(黃菊飮)이라 하여 자기가 가꾼 국화를 친구와 함께 완상하며 술을 즐겼습니다. 특히 음력 9월9일의 중양절에는 국화로 꽃지짐을 해서 국화전을 먹었다고합니다. 또한 국화는 직접보기도 하였지만 운치있는 국화 감상법이라하여 촛불을 이용해 화분에 있는 국화의 그림자를 만들어 그 그림자를 보며 즐기는 감상법이 유행했다고합니다.
겨울에는 매화음(梅花飮)이 있었습니다. 이 꽃놀이는 난로회(煖爐會)라 하는 모임과 겸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는 보통 화분에 매화를 옮겨 심고 방안에서 잘 기른 후 눈 속에서 꽃을 피우도록 한 후 화로에 둘러 앉아 고기를 구워먹는 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도 고기 대신 맑은 차를 마시며 매화를 완상하는 것을 더욱 맑은 운치로 여기며 난로회를 즐기지 않는 선비도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이런 식으로 꽃놀이를 즐겼다면 집안 여인들도 꽃놀이를 즐겼습니다. 이는 『덴동어미화전가』와 같은 화전가들과 조선시대 세시풍속을 기록해 놓은 『동국세시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양반가 여인들은 문중의 정자, 시조묘 등에 가서 진달래꽃을 따다가 화전을 만들어 먹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화전가와 같은 글을 지으며 놀았습니다. 그와 달리 일반 서민들은 마을 공동 꽹과리, 장구, 북 을 갖고 올라가 가무의 반주로 삼고 음주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간단하게 우리 조상들이 벗들과 함께 즐겼던 꽃놀이를 알아봤습니다. 이런 벗들을 모아 즐기는 꽃놀이 말고도 『태종실록』에 따르면 왕이 술을내려 관각마다 계절별로 특색있는 연회를 벌였다고도 합니다. 이로써 옛날부터 우리나라에서 꽃놀이를 즐겨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에 꼭 빠지지 않고 음식과 술이 등장하는 것도 뭔가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벚꽃놀이와도 비슷해 보입니다.


3.우리가 즐기는 벚꽃놀이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요즘 우린 봄에는 벚꽃놀이를 즐깁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나라에서는 봄에 주로 진달래와 살구꽃을 감상했습니다. 그리고 문헌이나 전통회화에서도 벚꽃은 그다지 등장하지 않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그런 벚꽃은 언제부터 들어왔고 이 벚꽃을 보며 즐기는 벚꽃놀이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우선 한국에 벚나무가 언제부터 있었는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만 벚나무의 대량 도입은 일제의 침략시기 일본인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하면서 자신들의 문화적 상징인 벚꽃을 심었고 심어진 벚꽃은 일본 제국을 상징하는 기능을 하도록 유도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징적 역할로써 들여온 벚꽃이 정확히 언제 심어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1933년 경성일보 4월 27일자 기사를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벚꽃은 1907년 현재의 남산공원 근처, 당시 지명으로는 남산 왜성대 공원에 일본인들이 도입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키며 그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세우고 일본식으로 변화시키면서 1908년부터 1909년 2년에 걸쳐 창경원에 벚꽃을 심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부터 일본인들은 본격적으로 궁궐 외에 사직단 등 조선왕조와 관련된 공간, 일본인 주거지, 새로 조성되는 공원이나 신사 주변에 적극적으로 벚나무들을 심기 시작합니다. 이런 움직임은 1907년 서울에 벚나무가 처음 도입된 후 1930년대까지 목포, 이천 등 전국적으로 퍼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일제의 강점이 시작된 이후부터 일제는 대중통치 차원에서 여가활동을 크게 장려합니다. 여기서 장려된 여가활동은 연극, 음악, 교외 산책, 관광, 스포츠 등으로 당시에 ‘건전한’, ‘도시풍’ 활동이라는 이름으로 학교, 신문 등을 통해 홍보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대규모 운동회, 한강 불꽃놀이 등 대규모 축제들도 활성화시키며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즐기던 줄다리기, 석전 등 우리민족의 전통적 놀이들은 ‘야만적’ 폐풍이라며 금지 또는 통제를 하게 됩니다.

일제가 장려했던 여가활동은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서민층들이 즐기기에는 어려운 여가활동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대규모 축제 개최, 창경원의 유원지화 등과 같은 변화로 가난한 서민들도 일제에 대한 반감과는 별개로 여가를 즐길 여건이 마련 되었던 것이죠. 때마침 1907년 2~3년차 묘목으로 처음 도입된 벚나무들도 1910년대 중반 점차 자라 놀이를 즐길만하게 꽃을 피우게 되면서 오늘날과 비슷한 나들이 형식의 벚꽃놀이가 활성화됩니다. 가장 처음 벚나무가 대량 이식된 왜성대 공원은 1914년 하루에 무려 10만에 달하는 사람이 몰려들기도 합니다. 또한 특권층 일본인들이 야간에 창경원 벚나무 밑에 앉아 술자리를 벌이는 일이 자주 있자 창경원을 밤에도 개방하라는 여론이 일어 1924년 4월20일 부터는 위 사진3처럼 밤 벚꽃놀이가 새로운 문화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러한 벚꽃놀이의 인기는 1945년 해방 때까지 지속됩니다.

광복 이후에는 일제를 상징한다고 생각되던 벚나무가 잘려나가며 벚꽃놀이라는 문화는 잠시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6.25 전쟁이 끝난 1958년 시민들의 요청으로 창경원의 밤 벚꽃놀이가 재개됩니다. 그래도 이때까지 벚꽃놀이는 민족적 정서에 반하는 일제 강점기시대의 문화와 인기 있는 대중문화라는 두가지 시선 사이에서 예전같이 크게 퍼지지 못합니다. 그러다 이 벚꽃놀이는 1961년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뒤 전환기를 맞습니다. 봄맞이 축제로 벚꽃놀이를 즐겼던 박정희가 1962년 진해에서 벚꽃을 본 뒤 이듬해는 벚꽃놀이를 중심으로 축제를 열 것을 지시했고 그 결과 1963년, 바로 그 유명한 진해 군항제가 시작됩니다. 또한, 이 시기 제주도와 전남 해남에서 자생 왕벚나무를 발견합니다. 그로써 이전부터 있었던 왕벚나무의 자생지가 제주도4라는 식물학자들의 주장이 한국에서 더욱 각광받습니다. 이에 따라 벚꽃이 일제의 상징이라는 민족적 정서의 반감도 어느 정도 덜어냄으로써 벚꽃놀이는 더욱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벚나무는 전국 지자체에 의해 다시 심어지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각 지자체에서는 이를 관광상품들로 개발해서 축제가 이루어지며 지금 우리가 즐기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니 우리나라에서도 참 오래전부터 꽃놀이를 즐기기도 했고 지금 우리가 즐기는 벚꽃놀이에도 꽤 많은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노는 것은 다 거기서 거기구나 싶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여름에 즐겼다는 피서음의 벽통음은 좀 해보고 싶네요ㅋㅋㅋ 그러면 날씨도 좋은 요즘 벚꽃놀이도 좋지만, 밤에 즐기는 벚꽃놀이는 어떨까요? 불가피하게 봄에 즐기지 못했다면 다른계절에 그 계절에 피는 꽃을 보며 선조들이 즐겼듯 우리들만의 풍류를 즐겨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다음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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