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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와 기묘사화

중종과 조광조


연산군이라는 희대의 폭군이 일으킨 무오년과 갑자년의 사화로 사실상 중앙정계에서 사림파는 소멸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림파들은 젊은 선비들을 중심으로, 지방에서 스승들의 뜻을 이어가며 언젠가 중앙정계로 복귀할 날을 꿈꿔왔습니다.

마침내 폭군 연산군이 폐위되고 반정으로 새 임금 중종이 즉위하였습니다. 새로 임금이 된 중종은 연산군이 벌인 폭정을 개혁하길 원했습니다. 또한 반정을 주도하여 공신으로 책봉된 정국공신(靖國功臣)들의 권력이 커지고 권력을 이용한 부정축재가 심해지자 이를 견제하고자 사림파를 다시 등용합니다. 이렇게 젊은 사림파들 200여명이 대거 등용되었고 이들 중에는 기묘사화의 주인공 조광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광조는 김종직의 제자 중 성리학에 대한 연구가 가장 깊었던 김굉필(金宏弼)의 제자였습니다. 1515년(중종 10년)에 성균관 유생 2백여 명이 연명(連名)하여 그를 천거하였고, 이조판서 안당(安塘)도 그를 추천하여 그는 장원급제만이 받을 수 있는 6품 벼슬을 받게 됩니다. 그 뒤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전후 5년간에 걸쳐 정계에서 활약하게 됩니다. 그의 정치적 목표는 유교를 바탕으로 하는 이상적인 사회 구현이 목표었습니다.


조광조 프로필

조광조는 개혁을 위해 먼저 과거시험이 훈구파들 때문에 공정하지 못하다 여기고 지방에 숨어있는 인재 발굴을 위한 현량과를 중종에게 제안하여 실시합니다. 현량과는 천거, 즉 추천을 통해 관직에 임명되는 제도였는데, 이 제도를 통하여 사림파들이 대거 등용될 수 있었습니다.


세력 다툼! 중종은 과연...?

하지만 조광조의 지나친 이상주의가 발목을 잡습니다. 일례로 국경지대에 여진족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중종이 예방전쟁 차원으로 여진족에 대한 기습공격을 지시합니다. 그런데 조광조는 ‘기습작전은 도의에 어긋나다’하면서 글을 보내 여진족 추장을 타이르고, 그때 말로 안되면 정정당당하게 대규모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도리에 맞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면서 그가 이상주의자라는 한계를 드러내고 맙니다.

그러던 중, 그가 몰락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 두 가지가 터지고 맙니다. 바로 소격서 철폐와 위훈삭제 문제였습니다. 당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관청이었던 소격서를 두고 조광조는 ‘성리학을 근간으로 두는 국가에서 하늘에 대한 제사는 미신’이며 중종이 천자(天子)가 아닌 일개 제후이기 때문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중종이 ‘세종대왕시절도 소격서가 있었다.’ 라고 반박하자 조광조는 대뜸 세종대왕의 유일한 오점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이는 자칫 왕조 전체를 욕보인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는 발언이었습니다.

위훈삭제는 중중 14년 10월 25일, 조광조는 정국공신들이 지나치게 많다며 이를 조정해야 한다고 건의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중종이 반대하자 조광조와 대간들은 사직서를 제출하며 밤늦도록 중종과 대치를 합니다. 11월 9일 결국 조광조 일파의 위훈삭제가 수리되어 총 19명의 공신들이 칭호를 박탈당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박탈당한 공신들의 다수는 무장들이 많았고 이들 무장들은 실질적인 군사력을 동원하여 반정 성공에 많은 기여를 했음에도 상대적으로 박한 대우에 불만이 많았는데, 이로 인해 사림파에 대한 반감이 더욱 커졌습니다. 또한 이렇게 훈구파와 공신들은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는 데 비해 조광조 일파는 무력 확보에는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중종 입장에서도 이제 조광조는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중종이 사림파를 등용한 것은 개혁적인 정치를 펼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왕권강화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고 조광조는 이러한 왕의 의도 보다 더 강력한 정책을 주장했습니다. 또한 공신들과 훈구파들의 불만 역시 쌓여가는 만큼 중종도 이들 훈구파가 폭발할 경우 마땅히 제어할 수 있는 대책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중종은 한밤중에 군사를 소집하고, 갑자기 영의정 정광필과 좌의정 안당 등 의정부의 대신들을 급히 소집하여 조광조를 ‘붕당을 만든 죄’로 처형하라고 합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사관조차 “조광조를 총애하던 왕과 조광조를 죽이려던 왕이 같은 왕인가” 라는 사론을 남길 정도로 갑작스런 태도 변경이었습니다. 정국일등공신 홍경주가 무사 30명이 조광조를 죽이려고 하니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는 조광조를 벌해야 한다고 왕에게 간언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군사권을 쥐고 있는 훈구파의 최후통첩이었죠. 중종으로써는 이들을 제어할 힘도 부족했고 또한 조광조라는 존재는 어쨌든 부담스러운 존재였으니까요.

중종은 우선 조광조를 능성으로 귀양보내지만, 조광조는 한달만에 사약을 받고 죽습니다. 그는 죽기전까지 금부도사에게 왕이 특별히 자신에게 남긴 편지는 없었냐고 물어볼 정도로 정계복귀에 대한 강력한 의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그의 죽음을 놓고 사약은 지나치다는 의견이 다수였습니다. 심지어는 조광조의 반대세력들도 사약은 지나치다라고 결사 반대할 정도였지만 중종은 사약을 강행합니다.

중종은 조광조뿐만 아니라 김식, 김구 등 다수의 조광조 일파와 그를 두둔하였던 영의정 정광필과 좌의정 안당도 유배를 보내 버립니다. 그리고 현량과도 폐지합니다. 이렇듯 독선적이고 지나친 이상론은 결국 그에게 비수가 되어서 돌아옵니다.

하지만 조광조가 구현하고자 했던 유교정치의 이상 만큼은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사림파들은 이후 지방을 근거지로 다시 힘을 회복하여 선조대에 이르러서는 훈구파를 몰아내고 조정을 장악하여 성리학을 확고한 조선의 근본 사상으로써 위로는 공경대부부터 아래로는 상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공유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조광조와 기묘사화는 어떤가요?

이상을 택하여 거칠 것 없이 밀고 나갔던 조선의 사나이 조광조 여기 까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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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plefalcon

보라매 역사연구회

Comments 1

  1. 사림파의 성리학적 사대주의는 결국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하고,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사변의 먼 원인이기도 하고, 또 반면에 면면히 이어져온 성리학적 유교관은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정신적 요소로서도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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