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고

1401년 백성들을 위한 제도 하나가 만들어지고 있었어! 백성들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신문고’라는 북이야!! 참 신기하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국민신문고도 이 제도를 본 따서 만들어진 제도야(사실 지금 국민 신문고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 ) 왕에게 직접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었던 신문고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조선시대 백성을 위한 북이 만들어지다.

조선이 유교를 기본이념으로 하여 만들어진 나라 인건 알고 있지? 조선왕조는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는다는 ‘민본사상’, 신민들을 덕으로 다스린다는 ‘덕치사상’ 그리고 여론에 따라 나라를 다스린다는 ‘공론정치사상’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웠어. 그래서 조선의 왕들은 다양한 언론기관을 만드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 했어.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기관이 너희들이 국사 시간에 배운 삼사야. 그런데 이런 기관들은 양반들의 의견을 듣는 제도이지 백성을 위한 제도가 아니었어 그래서 백성들은 억울한 일이 있으면 직접 왕의 앞에 나서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수 밖에 없었어. 이에 따라 태종은 1401년 8월 송의 등문고를 본 따서 신문고를 처음으로 만들게 돼!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신문고?

 신문고는 백성들의 이야기를 듣자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어. 특히 태종실록을 보면 태종이 억울한 백성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신문고를 설치 했다는걸 잘 알 수 있지? 그런데 말이야 신문고가 백성들의 억울한 이야기를 듣는 소통창구는 되지 못한것 같아.

고할 데가 없는 백성으로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올릴 자 또는 서울과 외방의 고할 데가 없는 백성에게 상당할 기회를 주기 위해 신문고를 설치한다’

 

조선 초기 격고(억울한 일이 있을 때 임금이 있는 곳 근처에서 북을 쳐 호소하는 일)의 안건들을 살펴보면 일반 백성들이 아니라 주로 양반계층들이 노비나 토지의 소유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하였다는걸 알 수 있어. 게다가 신문고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상당한 불편 사항들이 많았다고 해. 조선의 법전 경국대전에 수록된 신문고의 신고 절차를 살펴보면 정말 잘 알 수 있어.

 

억울하고 원통함을 호소하는 자는 지방 관찰사에게 내용을 올린다. 그렇게 한 뒤에도 억울함이 있으면 사헌부에 고하고 그래도 억울함이 있으면 신문고를 친다”

 

억울함이 있는 백성들은 지방 관찰사, 사헌부를 거치고 나서야 신문고를 칠 수 있었어. 하지만 신문고에 가기 전에 지방 관찰사나 사헌부에서 벌을 받는 경우가 대다수 였다고 해. 게다가 신문고는 죄인을 심문하고 고문하는 의금부 당직청에 설치 되어 있엇기 때문에 백성들은 신문고를 울리기 위해서는 엄중한 조사와 심문을 거쳐야 했어. 게다가 글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해야했지. 이러한 까닭에 백성들은 신문고를 잘 사용하지 못하였다고 해.

정조시대 격쟁과  그 후 

신문고가 사용하는데 어렵고 부민고소금지법(쉽게 이야기 하자면 백성이나 낮은 등급의 관리가 높은 관직에 있는 관리들을 고소 하지 못하게 만든 법이야. 세종시기에 만들어 졌어. 모든 경우에 고소 하지 못하는건 아니었고, 상급 관리의 오판,비리 등으로 인해 억울한 일을 당한 경우에 서울은 주장관 지방은 관찰사에게 호소할 수 있었어.)  등이 만들어 졌어. 이에  따라 조선 후기 백성들은 왕이 궁궐 밖으로 나온 행렬에서 꽹과리, 징 등을 치고 왕에게 가 자신의 억울함을 적은 항소지를 전달하는 격쟁을 주로 하였어. 지방관의 부패, 처첩을 가리기 위한 호소, 양반과 평민을 제대로 가려달라는 항소 등 다양한 내용들이  왕에게 전달되었지. 그런데 말이야  임금의 행차에 뛰어들어 소란을 피운 죄 가 백성들에게 적용되어 형조에 끌려가 형장을 맞음 다음에야 소원 수리가 이루어 졌어. 백성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자 했던 조선 22대 왕 정조는 이러한 격쟁을 활성화시켰고, 그의 재위 당시 일성록에 기록된 격쟁 관련 기록은 약  1,300개에 이르러. 그러나 정조가 죽은 이후 격쟁은 그 의미가 퇴색되었어.

지금까지 신문고에 대해 알아봤어. 글에서 봤듯이 신문고는 백성들의 억울함을 해소하지 못했어.  세종시기 부민고소 금지법이 만들어져서 상관을 고소하는 것도 어려웠고. 절차상 백성들이 쉽게 이용하기 어려웠어. 물론 영조나 정조같은 임금들이 백성들의 목소리를 더 듣기 위해 격쟁을 활성화 시키거나 전에 없어졌던 신문고 제도를 다시 부활 시켰지만, 사료를 보면 그 이외의 시기에는 신문고 사용이 극히 적었어. 바로 신문고가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는 이야기야. 나는 신문고가 왕권의 강화를 위해 사용되었다고 생각해(이건 순전히 나의 의견이야). 이러한 제도를 만듦으로써 신하들에게 경고를 했던거지. 너네 잘못하면 알지? 신문고 있으니깐 두고 볼거야? 약간 이런 의중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  신문고에 대한 글은 여기서 끝이야!! 다음 주에는 집현전에 관한 글이 올라올거야. 그럼 4주 후에 또 재미있는 주제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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