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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사학의 아버지, 이병도에 대하여

이병도는 ‘객관적 사료 비판’에 의한 역사적 진실을 추구했던 ‘한국 근대 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일제강점기 사학자다. 문헌상 접근뿐만 아니라 고고학, 인류학, 어원학 등 뒷받침 할 보조 이론들을 도입하여 한국 고대사를 서술했다는 것이 이병도 사학의 가장 큰 특징이다. 대중들에게 알려진 바와 다르게 이병도는 예맥족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설정하여 고조선을 한 반도 북부와 중국 동북 지역의 역사적 주체로 서술하였고 이후 삼국, 통일신라사는 민족의 흥기와 문화 융성을 기준으로 서술하였다. 이병도는 각 국가의 전성기를 근초고왕의 백제, 광개토대왕·장수왕의 고구려, 법흥왕·진흥왕의 신라로 보았는데 이 시각은 현재 한국사 교과서에도 기술되어 교육할 정도의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병도의 방법론은 오늘의 한국 사학의 주류가 되었다. 이병도의 ‘객관적 문헌비판’은 민족주의 사학과 접근하면서 비판적인 안목을 강조하여 역사적 사실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또한, 이병도의 주 연구주제인 도참사상과 한국유학사로 비롯된 사상사는 그가 연구할 당시부터 지금까지도 인기가 많지 않은 학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상사 연구에 매진하 여 후대 사학자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이병도는 부분적으로 보조 이론을 도입하였으나 문헌비판과 보조 이론을 종속관계로 파악하며 랑케가 제시한 실증사학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병도가 사상사를 서술하며 가장 중요시 여겼던 ‘삼면 작업’1) 중 하나인 고려사 연구에서 풍수와 도참을 구분 짓지 않고 도참으로 귀결시켜버린 것이다. 이 결과 “고려왕조 내내 도참은 비보사찰 건립 등을 통해 국고를 낭비하고 백성들을 혼란하게 했다.” 등의 표현으로 고려사를 일관되게 부정적으로 서술하는데 이로 말미암아 이병도는 여말선초 시기의 배불론에 입각한 사료들을 중점으로 고려를 바라보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또한, 역사지리의 기본인 위치비정 문제 (백제 풍납토성 문제)에서도 오류를 범하기도 하는 등 비판 받을 점도 많다.

이러한 합리적이고 학문적인 비판 외에도 “이병도는 친일파였다. 그러므로 그의 연구는 식민사관에 입각한 연구이다.” 라는 다소 억측이 있을 수 있는 비판이 있다. 이병도는 조선사편수회에서 1925년부터 1927년까지 수사관보로, 이후 1938년까지 촉탁을 맡아 활동했는데 이병도가 근무했던 조선사편수회나 청구학회는 식민사관으로 한국사를 왜곡연구한 단체이다. 심지어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총독부 직속기관으로써 이병도는 조선총독부 직원록에도 등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병도의 조선사편수회 근무 기간이 매우 길었다는 점에 근거하면 이병도는 확실한 친일파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이병도가 수학했던 와세다대학교의 교수이자 이병 도의 스승이라 불리는 식민사학자 요시다 도고는 식민사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막대한 영향을 끼친 핵심 식민사학자이다. 특히 고대사 연구에 집중했던 요시다는 이병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이에 이병도가 직, 간접적으로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이병도는 조선사편수회에서 같이 근무했던 신석호와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을 만큼 대중들에게 친일파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이병도가 1934년 진단학회를 조직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진단학회는 한국학연구단체로 순수학문연구 차원의 단체였다. 진단학 회는 조선어학회와 함께 일제의 탄압을 받아 이병도는 일제에 의해 체포되기도 하였다. 진단학회는 학문적 연구 기반이 미비했던 일제강점기에 조직된 학문연구단체로써 식민사관의 영향 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이 존재하나 한국학을 스스로 연구하는 환경을 제공하는데 시금석 역할을 하였고 진단학회의 연구물을 바탕으로 현재의 한국학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간과 해선 안된다며 이병도는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병도는 조선사편수회 소속 당시 무급으로 근무했으며 창씨개명을 거절하여 요시찰인으로 지목되었다는 증언과 “청구학회 근무 당시 실제로 근무하지 않고 이름만 들어가 있었다.”는 일본인 학자에 증언을 근거삼아 이병도는 친일파가 아니었다는 주장을 한다.

이병도를 둘러싼 친일 논란은 소위 강단사학으로 대변되는 학계 주류 사학과 민족사학으로 대변되는 비주류 사학 간의 대립으로 확대되었다. 이병도의 제자인 이기백은 한국사신론을 통해 이병도의 사관을 그대로 가져갔다. 노태돈, 조인성, 송호정 등 주류사학계 역사학자들도 이병도의 실증사학을 수정 내지 답습하여 고대사를 저술하였다. 이에 대해 이종욱 서강대 석좌교수는 “노태돈 등 서울대 사단은 식민사학의 찌꺼기다.”라고 비판하며 주류사학계에 정면으로 맞서는 고대사 논쟁을 예고하였다. 이 논쟁의 중점은 신라 부 체제설2)이다. 이기백을 거쳐 노태돈이 체계를 구성한 한국사학계의 지배적 이론이지만 이종욱 등 부 체제설 반대론자들은 지속적으로 반론을 제기해왔다. 이 문제는 신라가 언제부터 중앙집권적 국가가 됐는지, 그 시 점에 따라 신라본기 초기기록의 신뢰 여부와 매우 밀접히 연관되어있으므로 이 논쟁에 따라 고대사에 대한 해석이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어 매우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이종욱은 6세기 이전부터 신라는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여 정복전쟁을 벌인 만큼 고대사를 재집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노태돈은 “이 교수는 새로운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는 채로 과거의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다수의 고대사학자들은 이 교수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라며 이종욱의 이론을 부인했다.3) 이 논쟁은 20년 넘게 진행되었음에도 아직 뚜렷하게 확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어 끝나지 않을 전망이다. 이외에도 이덕일, 복기대 등 ‘유사사학’, ‘재야사학’으로 분류되는 역사학자들은 이병도부터 송호정까지의 ‘강단사학자’들을 식민사학 1세대, 2세대, 3세대, 4세대로 구분지어 모두 일제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답습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좌우간 한국 근대사학은 실질적으로 이병도에 의해 수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 유학자들의 정통사관에서 근대 사학으로 넘어오는 과도기적 시대에 이병도는 객관성을 중시한 덕분에 이후 한국 사학은 “일제를 극복하자”는 국학풍이 주류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고증을 통해 왜곡을 줄였다. 이는 최근 동북아시아의 큰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역사 왜곡 문제에 대해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와 바탕이 되었다. 이병도에 대해 “친일행위를 하지 않았다.”라고 확언할 수 없으며 여태껏 과거의 행적으로 보아 소극적 친일파인 것은 유추 가능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병도의 연구를 모두 ‘친일’, ‘식민’ 프레임을 덧씌워 매도하는 것은 교과서에 실린 삼국 관련 사실을 부정하게 되는 타당하지 못한 주장이다. 적절한 비판적 수용을 통한 이병도 사학 습득은 한국 고대사 연구의 폭을 넓히는 획기적인 일로써 이를 적극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reference

1) 삼면 작업 : 고려의 불교와 도참사상, 통일신라 시기부터 발달하여 조선 대에 꽃 핀 유학 세 개를 일 컫는다.

2)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이 등장하는 6세기 이전까지는 신라가 6개 부의 연합정권으로 왕은 1개 부의 대표자였다는 설

3)안동환, 「“서울대학파, 식민사학의 찌꺼기들” 이종욱, 고대 역사전쟁 포문 열다」 서울신문 2016-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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